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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판사가 왔다

AI 판사가 왔다
2021년 9월, 나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오체투지를 하다가 일반교통방해죄로 조사받았다. 검찰청이 해체되고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사건은 그렇게 묻혔다. 정권이 바뀌었다. 검찰청이 부활하고 공소시효 10년을 앞두고 약식기소 되었다. 정확히는 9년 8개월 후에 벌금 300만 원에 약식기소 되어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불기소의 무덤에 잠들었다 부활한 내 사건은 인공지능 재판에 얻어걸렸다. 벌금 300만 원 판결이 나와 항소했지만 기각되었다. 판결문에 오류가 발견됐다. 형사소송법에 없는 495조를 언급했다. 할루시네이션 즉 사법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오류다. 이런 식으로 오류를 일으키면 항소도 상고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세상이 됐다.

국회의원 보좌관인 김복희는 의원에게 따라 하라고 했다. "모든 법의 가장 첫 번째 목표는 정부와 높은 사람의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책임은 떠넘기고 정치인은 착한 척하는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법을 만드는 원리이자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김복희는 새로 만들 법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서 소관 위원회 위원장에게 가져갔다. 내용을 들은 보좌관은 "로봇 수술 안전 보장법"을 새로 만들자고 했다. 내용은 그저 그렇지만 제목을 잘 짓자고 했다. "로봇 수술의 안전 보장과 환자 생명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 됐다가 상투적인 말을 집어넣어 "차세대 로봇 수술의 안전 보장과 환자 생명 보호를 위한 맞춤형 종합 대책 위원회 등에 관한 특별법"이 되었다. 국회의원들은 내용은 없지만 이름만 그럴듯한 법을 인공지능에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법령은 빠르게 늘어났다. 2020년 중반에 150만 건이든 법령의 조항 숫자가 1억 개가 되었다. 인공지능을 돌리면 누구라도 바늘 도둑을 소도둑으로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2036년 10월 9일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일반 재판과 국민 참여 재판 그리고 AI 판사 디케의 재판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디케는 친절하게 답변했고, 판결문을 바로 공개했다. 판결은 공정했고, 평판은 좋았다. 디케의 재판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법정에는 AI 판사의 판결문을 대독할 인간 보조 판사 두 명이 서 있다. 참고서만도 못한 인생을 살아왔던 윤은 교과서와 같은 인생이었을 타락판사라는 해커를 만났다. 둘은 AI 판사 디케를 해킹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안드로이드 살인이 일어났다. 디케는 언론사에 이메일을 보냈다. "새로운 법의 시대에 함께 승차해 주세요. 낡은 법전에 올려놓고 있는 손목이 잘려 나가기 전에."

2046헌마389 러브로봇금지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는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개정된 헌법과 헌법재판소법에 따라 9명의 재판관 중 1명의 재판관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임명되었다. 지방법원 합의부 배석판사 중 한 명도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되었다. 인공지능 재판관인 '수헌 1호'의 의견은 화제가 되며 효능감이 대단해졌다. 수헌 1호는 이론적 근거와 논리적 일관성 측면에서 인간 재판관을 압도하곤 했다. 러브로봇금지법도 처음에는 수헌 1호 재판관만 위헌 의견을 냈지만, 마지막 평의에서는 위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족수 여섯 명이 채워졌다. 선고일 하루 전, 긴급 평의가 열렸다. 처음부터 위헌 의견을 낸 수헌 1호 재판관이 합헌 의견으로 돌아섰다. 수헌 1호 헌법재판관은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 법정에서 만든 판결문과 판례를 학습한 인공지능 판사라면, 당장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재벌은 삼오법칙(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벗어나지 않을 게다. 지금까지 그렇게 판결을 내렸으니까 당연하다. 다만 이러한 불합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학습한 AI 판사라면 무방하다. 그 이후는 어찌 될지 도통 모르겠지만, 지금은 소설이 사실이 될지 걱정이다.

AI 판사가 왔다/정보라, 조광희, 곽재식, 박진규/&(앤드) 20260320 208쪽 13,000원